엄마의 의무를 다하느라 바쁜 나날들이었습니다. 새 학기에 적응하고 나니 상담과 공개수업, 학부모 총회 등이 차례차례 지나가고, 이제야 겨우 뭘 좀 해볼까 하니 아이들이 아팠습니다. 바이러스가 창궐한다더니 두 아이 모두 콧물과 기침을 달고 살다가 급기야 독감까지. 겨우 다시 맞이한 5월은 가정의 달, 첫째의 운동회와 손님맞이까지 정말 쉴 틈 없이 몰아쳤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결코 엄살은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내가 하려던 일들은 자연히 뒤로 미루게 되었습니다. 사실 엄마들의 일상이 보통 그렇습니다. 가족들을 항상 우선순위에 두고 생각해야 하다 보니 그 사이에 나의 욕구를 끼워 넣는 일이 굉장히 사치스럽게 여겨지곤 합니다.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엔 시간도 체력도 부족한 경우도 부지기수입니다. 특히 아이가 어릴수록 엄마는 개인적인 시간을 내는 것이 더욱 힘듭니다. 이런 나날이 계속되다 보면 '아, 이제 한계구나.' 싶은 순간이 찾아옵니다. 지쳐버린 몸과 마음, 번아웃의 엄마. 만사 다 제쳐두고 집은 한 권의 그림책에서 위안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비슷한 상황일 엄마들과 나누고 싶어 기록해 봅니다.
1. <당신의 마음에 이름을 붙인다면> 책 소개
표지부터 이미 아름다운 이 그림책은 마리야 이바시키나의 <당신의 마음에 이름을 붙인다면>입니다. 백발의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얀 머리칼과 많이 듬성듬성해져 버린 머리칼, 하지만 두 사람은 아주 가깝게 붙어 앉아 있습니다. 신혼여행으로 갔던 몰디브, 그곳에서도 다정하게 손을 잡고 휴양을 즐기는 백발의 부부들이 눈에 콕 들어와 박혔습니다. 그 모습이 참 아름다워 우리도 호호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꼭 저렇게 손잡고 여행 다니자 했더랬습니다. 그 옆에 쓰여 있는 단어는 '카푸네.' 포르투갈어로 '사랑하는 사람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빗어 내리는 일'이라고 합니다. 굳이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사랑 그 자체인 단어입니다.
책을 펼치면 이처럼 아름다운 세계 각국의 단어들이 펼쳐집니다. 쿠리, 블루슈트페르틀리, 메라키, 아르바이스글라에데, 나즈, 셋타 렛다스트, 비비르 알 디아, 콤무오베레, 헤젤리흐 등등....... 이런 뜻을 담아내는 단어가 있다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단어들. 하나하나 모두 기억하고 싶을 만큼 좋습니다.
아이들이 부르는 동요 중에 <참 좋은 말>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사랑해요~ 이 한 마디, 참 좋은 말~ '로 이어지는 노랫말이 참 예뻐서 가사를 전부 알지 못해도 종종 아이와 흥얼거리는 노래입니다. <당신의 마음에 이름을 붙인다면>을 처음 읽고서 이 노래가 떠올랐습니다. 참 좋은 말들이 가득 들어 있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말은 그 자체로 힘을 가진다고들 합니다. 아름다운 단어를 소리 내어 읽어보고, 그 뜻을 음미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기분이 드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그림책입니다.
2. 내 마음에 와닿는 책 한 권이 주는 힘
이 책을 번역하신 김지은 작가님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작가님은 글 쓰는 것만큼이나 말씀도 잘하셔서 강연뿐 아니라 책 관련한 자리에서 사회도 자주 보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작가님을 처음 뵈었을 때 참 글처럼 따뜻하고 소녀 같은 분이시구나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김지은 작가님이 번역하시는 책이라면 믿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작가님은 이 책을 책상 한편에 올려두고, 마음에 위로가 필요할 때마다 펼쳐보신다고 했습니다. 그 자체로 위안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 마음에 와닿는 책 한 권이 주는 힘은 강력합니다. 도무지 웃을 수 없을 것 같았던 나를 슬며시 미소 짓게 만들고, 정말이지 아무것도 하기 싫었던 나를 움직이게 합니다. 그저 읽고 좋아서 되뇌는 것 만으로 알 수 없는 힘이 퐁퐁 솟아납니다. 비록 하루 한정, 몇 시간 한정일지라도 말입니다. 저도 지금 내게 좋은 책은 잘 보이는 곳에 꺼내어 두려고 합니다. 표지를 슬쩍 어루만지고 후루룩 훑어보는 것 만으로 기분이 좋아질 것 같습니다. 좋은 선물을 볼 때처럼 말입니다.
3. 엄마의 마음은 지금, 어떤 이름인가요?
하고 싶은 일 이전에 해야 하는 일들은 항상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특히나 집안일이라는 건 정말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무서운 일입니다. 블로그에 글도 쓰고 싶고, 읽고 싶어 빌려둔 책은 쌓여 있고, 운동도 하고 싶지만 밀려 있는 설거지거리, 집 청소와 빨래 등 하지 않을 수 없는 일들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다 보면 어느새 아이들이 올 시간. 다시 오늘 저녁을 고민하는 엄마로 돌아가기 마련입니다.
해야 할 일은 가득한데 내 몸은 하나이고, 도무지 제대로 해내거나 끝내는 것이 없다는 기분은 사람을 생각보다 아주 많이 우울하게 합니다. 직장에서 일을 할 때엔 잘하든 못하든 어쨌거나 일의 끝이라는 게 있고, 잘 된 일은 칭찬받고 함께 고생한 동료들과 서로 토닥이며 격려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집안일은 이런 면에서 참 외롭고 고독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마음을 돌아보는 시간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나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말을 듣고 싶은지, 어떤 기분인지 살펴야 합니다. 그렇게 나의 내면에도 에너지를 채워 넣어야 다시 밖으로 에너지를 꺼내어 쓸 수도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림책은 그런 면에서 참 좋습니다. 두꺼운 책을 읽을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부족하다면, 가볍게 집어 들고 시작과 끝을 낼 수 있습니다. 끝내지 못한 일이 너무 많아 스트레스를 받는 중이라면, 한 권을 부담 없이 끝까지 읽을 수 있는 그림책을 읽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아이들을 위해서만 책을 고르지 말고, 나 자신을 위한 책을 골라 읽는 것. 생각보다 꽤 기쁘고 충만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엄마의 마음은 지금, 어떤 이름인가요?
부디 오늘은 조금 더 부드럽고 따스하기를, 화와 우울은 아주 잠시만 머물렀다 흘러가길 바라봅니다.